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원복집 사건 (문단 편집) == 영향 == [[제14대 대통령 선거|1992년 대선]]의 결과를 예상 외의 방향으로 규정 지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 받는다. 이 때문에 정주영 후보 측이 오히려 '''[[역풍]]을 맞아''' 이후 경상도에서 [[김영삼]] 민자당 후보의 지지율이 급등하면서 결국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. 국가 기관 관계자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해야 한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음에도 경상도 유권자들의 표심이 그 당사자들이 원하는 대로 투표하여 [[울산광역시|울산]]을 제외한 경상도 전체가 김영삼 후보로 표심을 결집하게 된 것이다. 이 사건을 폭로한 [[정주영]] 진영은 [[경상도]] 표를 잠식하지 못한 것은 물론 [[강원도]], [[충청도]]에서도 기대 이상의 표를 얻지 못하고 패했다. [[안티]] 김영삼 정서로 인해 선전할 줄 알았던 [[대구경북|TK]] 지역에서도 선거 막판 지역주의를 무기로 한 표심 결집으로 인해 [[김영삼]] 후보(TK지역 약 62%)에 밀려 2위(약 17%)를 기록했다. 특히 김영삼의 최대 지지 기반이자 사건의 발단이 된 '''[[부산광역시|부산]]에서 참패'''했는데 9개월 전 [[제14대 국회의원 선거|14대 총선]] 결과와는 달리 [[김대중]] 후보(12%)는 물론 [[부울경|PK]] 출신인 [[박찬종]] 후보에게조차 근소한 차(0.24%, 약 6천여 표 차)로 밀리며 6.3%를 얻는데 그쳐 4위로 마감했다. 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전국 여론조사 결과 부동층이 무려 30%가 넘고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각각 24%와 25%의 지지율을 기록하여 각각 승리를 자신했던 특이한 선거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. 선거가 끝난 뒤 불법 도청한 [[정주영]] 후보 측 사람들은 전부 [[주거침입]] 등의 죄로 [[https://news.sbs.co.kr/news/endPage.do?news_id=N1006687714|처벌]] 받았고 현대그룹의 자금줄이 2년간 묶였다. 훗날 [[참여정부]]에서 국무총리가 되는 [[이해찬]]은 당시 민주당 선거기획 쪽에 있었는데 그는 후일 이 사건으로 정권 교체가 5년 뒤로 미루어졌다고 평하였다. 다만 PK가 [[군부독재]] 시절 비집권당 후보를 지지한 전력이 있더라도 YS가 3당 합당에 참여한 후 치른 [[제14대 국회의원 선거|14대 총선]](1992년 3월 24일)에서는 경상도에서 민주당이 단 한 석도 얻지 못하는 등 지역감정이 뿌리 깊었기에 이 사건만으로 모든 것이 뒤집혔다고 보긴 어렵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